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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억, 오월 장소에 대하여카테고리 없음 2023. 7. 3. 11:37
기억의 기억, 오월 장소에 대하여
구가연, 최 연
도시는 우리가 거리를 방랑하면서 읽는 책이다.
그 텍스트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장시키거나 축소시키고,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당신을 중요한 사람처럼 느끼게도 만들고 버려도 되는 사람처럼 느끼게도 만든다.
우리는 누구를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하는가? 누가 그 문제를 결정하는가? 이런 질문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중략) 이 프로젝트는 장소에도 기억이 있다고, 우리는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억도 사람처럼 죽을 수 있지만, 계속 살아있도록 만들어질 수도 있다.
-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작년 5월, 가연과 잡지를 만들어 보자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강의에서 5·18을 배우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망월 묘역 말고 다른 장소를 가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는 문득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연은 중고등학교 시절 오월이면 5·18 사적지를 찾아 광주‧전남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어떤 곳들은 완전히 방치되어 있어서 도시 속 폐허 같았다고 했다. 왜? 둘 다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 그 자리를 찾아 가볼까. 며칠 뒤 505 보안부대와 국군광주병원을 가보았다. 두 곳 모두 울타리로 가로막혀 들어갈 수 없었고, 그가 기억하던 대로 그곳은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끊겨 넝쿨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을까.
우린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그 장소가 어떤 변화를 겪었고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물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글은 5.18의 기억이 담긴 장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만난 질문들. 장소에 의미와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도시 안에 기억은 왜 잘 보이지 않는지. 어떤 기억이 역사가 되는지. 무엇이 남고 무엇이 망각되는지.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사적인 기억은 각자의 기억 속에 남지만, 공동체의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고 전승되는지. 기억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진다는 것은 어떤 건지. 답을 찾아가다 보면 늘 그렇듯, 누군가는 계속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필요한 이야기라고 믿고,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하고 찾은 이야기들을 남겨본다.
1. 옛 도청
광주의 구도심, 충장로와 금남로가 만나는 자리에 옛 도청이 있다.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도시의 중심인데다가 5‧18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옛 도청건물 주위로는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 있지만, 도청건물은 굳게 닫힌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면서 농성을 하거나, 서명을 받는 사람들을 으레 마주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5‧18 민주화 운동에서 무엇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이야기해왔지만 그에 비해 어떻게 기억해야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이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진 곳이 옛 도청이다.
도청은 당시 항쟁지도부와 시민군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밥을 먹던 항쟁의 거점이었다. 도청 앞에서 사람들은 궐기대회를 열고,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뒤에서는 시신을 염했다. 27일 새벽, 끝내 남아있던 사람들이 싸웠던 곳도 도청이었다.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곳은 2004년까지 전남도청으로 쓰였다. 같은 해 광주에서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이 시작되며 옛 도청 터에 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하는 계획안이 수립되었다. 시에선 도청 터와 함께 역사적 가치를 담아 이곳을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 2008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도청 앞 민주광장과 전당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도청 별관 일부를 철거했다. 오월단체들은 별관훼손 문제로 점거 농성을 벌였다. 그 이후 여러 논쟁과 함께 지난한 시간을 거쳐 2015년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했지만, 도청건물을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한 민주평화전당은 반대에 부딪혀 개관하지 못했다. 건물 리모델링 과정에서 내부 일부가 철거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등 건물이 변형되었기 때문이었다. 헬기 사격 흔적이 지워졌다는 문제도 있었다. 2016년부터 3년간 오월 단체들은 도청을 1980년 당시 모습 그대로 원형 복구할 것을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5·18 기념행사에서 원형복원을 약속하고, 공식 복원추진단이 꾸려지며 농성이 끝났다. 지금은 2022년 완전한 원형복원을 목표로 옛 도청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2. 광천시민아파트
유스퀘어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광천시민아파트가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살았던 판자촌을 허물고 세운 광주 최초의 아파트다. 이름은 아파트이지만 3~4평의 184가구와 공동화장실, 공동 주방으로 이루어진 허름한 연립주택이다.
광천시민아파트는 지역 최초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의 근거지였다. 박기순이 주도한 들불야학은 이곳 다동 2층 방에서 밤새 토론하고, 밥해 먹고, 자고, 가르치고 배웠다. 들불야학에서 대학생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의미로 ‘강학’으로 불렸고, 노동자 학생들은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의 ‘학강’으로 불렸다. 시민아파트에 살거나, 광천공단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들불야학을 찾았다.
1980년 5월, 항쟁이 발발하자 시민아파트 주민들은 돈과 쌀을 모아 나동에 살던 윤상원에게 건넸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의 강학, 학강들은 항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을 대신해 밤새 이곳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해서 배포했다. 김영철은 5·18 시민군 기획실장으로 활동했고, 윤상원과 박용준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총에 맞아 숨졌으며, 박관현은 옥중에서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 숨졌다.
현재 시민아파트에는 24가구만 남아 살고 있고, 광천동에선 광주 역대 최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2020년 12월 재개발정비사업이 인가를 받았고, 광천시민아파트도 사업구역에 포함돼 철거될 예정이다. 그러나 보존에 대한 요구가 잇따르자 서구청과 재개발주택조합, 윤상원기념사업회가 보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 방안으로 원형보존과 부분존치가 거론되고 있다. 원형보존은 사적지 지정을 통해 시민아파트 가, 나, 다 동 전체를 보존해 역사문화교육장소 등으로 활용하는 안이고, 부분존치는 한 동만이라도 새로 지어질 아파트 공원 부지에 포함해 보존하는 안이다. 기념사업회 측은 3개 동 모두 보전하는 원형보존을, 주택조합 측은 경제적 손실 발생을 이유로 부분존치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견해 차이로 인해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3. 5·18 묘지
사람들은 죽은 이의 육체를 땅에 묻고 표식을 만들어 그곳을 장소화시킨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추모한다. 이 모든 게 떠난 이와 우리를 기억으로 연결하는 행위이다. 매해 5월이면 많은 사람이 망월 묘역과 5·18민주묘지를 찾아오는 것도 여기에 묻힌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다.
1980년 5월 시민들은 항쟁 중 사망한 희쟁자들을 손수레와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에 안장했다. 1981년부터 시민들은 이곳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당시 망월묘역에서 추모제를 진행한다는 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추모제는 3주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당국의 방해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연행되거나 구속되었다. 그 사이 부상자들은 후유증으로 연이어 사망하였고, 일부는 다시 망월에 묻혔다.
5·18 진상규명요구와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거세지며, 망월묘역에서 경찰봉쇄가 사라졌다. 매해 5월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과 민주인사들이 망월동으로 모였고, 1987년에는 5천여 명이 참석한 5·18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후 1997년 5월, 5·18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망월 묘역 바로 옆에 국립5·18민주묘지가 생겼다. 망월 묘역에 있던 주검들은 ‘열사’의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이장되었고, 5·18 추모제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5·18 기념행사’가 되었다. 망월 묘역은 ‘망월동민족민주열사 묘역’이 되었고, 이한열 열사, 박승희 열사, 김남주 시인, 백남기 농민 등이 안장되어 있다.
4. 505보안부대와 국군광주병원
구 505보안부대와 구 국군광주병원은 걸어서 10분 거리로 인접해 있다. ‘통합병원은 천국, 보안대’는 지옥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두 곳은 상이한 공간이지만, 두 곳 모두 국가폭력의 고통과 상처가 스며있다. 이후 두 곳은 군사시설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시민들로부터 격리되고 방치되어왔다. 한편으론 두 곳은 군사제한시설로 격리·방치되었기 때문에 도시개발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었다. 광산유치장, 녹두서점, 광주교도소 등 많은 사적지가 없어졌지만, 505보안부대와 국군광주병원은 훼손되기는 했어도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505보안부대는 5·18 당시 신군부 특전사령관, 전두환과 직접 소통하는 등 항쟁 진압 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였다. 시민들은 이곳 지하에 끌려와 폭행과 고문 수사를 당했다. 505보안부대, 상무대 등에서 고문을 당하다 의식을 잃은 이들은 광주국군병원에 보내졌고, 치료 중에도 계엄군의 감시는 계속되었다. 이곳 의료진들은 시민들이 다시 보안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들의 상태를 거짓으로 보고해서 보호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당시 근무했던 505보안부대 수사관과 미군 501정보여단 정보요원의 증언에 따라 병원 보일러실에서 희생자 시신이 소각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505보안부대는 2005년 31사단으로 이전할 때까지 군 기관으로 쓰인 후 방치되었다. 2007년에는 국방부에서 사업비 마련을 위해 부지매각을 추진하기도 했다. 5·18기념재단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서명운동을 전개한 덕에 매각절차가 중단되고 사적지 지정이 이루어졌다. 2014년 광주시가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넘겨받기는 했으나, 2009년 화재가 발생해 지붕이 내려앉고 건물 창틀은 뜯기기는 등 식당건물이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2015년부터 광주시는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 젊은 세대들을 위한 교육공간·청소년 창의공간 등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유족들과 5월 단체들은 “옛 전남도청처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며 원래의 모습을 변경시키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면 안 된다, 논의 과정에도 5월 단체를 포함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감금과 고문 수사가 벌어졌던 505보안부대를 청소년 역사체험공간으로 꾸미는 데 반대했다. 이후 광주광역시는 5월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남아 있는 건물은 원형 그대로 남겨놓고 나머지 공간을 활용해 5·18역사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2020년 7월 5·18역사공원 착공식이 있었고, 2021년 1월 19일부터 505보안부대 터 인근 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에서 해제되었다. 공원은 2023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광주국군병원은 2007년 함평으로 이전된 뒤, 505보안부대와 마찬가지로 부지와 병원시설들이 폐건물 상태로 방치되다가 2014년 부지 관리청이 광주광역시로 변경되었다. 2017년 5월에는 건물 외부가 시민들에게 산책로로 개방되었다. 현재 광주시는 이곳에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와 상담을 위한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5. 광산 유치장
현재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 곳들도 있지만, 광산유치장처럼 터만 남기고 없어진 곳도 있다. 광산유치장의 이야기는 남아 책·논문·기사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장소는 사라졌다. 이곳에 아파트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광산유치장 보존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이 남아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신군부는 5월 27일 이후 항쟁 수습 과정에서 5·18에 연루된 시민들을 구금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분리 구금되어 좁은 공간에 20명씩 수용되었다.
친구를 만나러 광주에 왔다가 항쟁 기간 가두방송을 주도했던 전옥주의 증언이다.
“공군부대에 남자들이 많아 광산경찰서로 보내졌다.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가니 옷을 벗기고 군 담요만 하나 주었다. 나는 그동안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이 몰려와 사흘 동안 잠을 잤다. 일어나보니 홍금숙(주남마을 학살 생존자), 유소영(조선대 약대 4학년)이 잡혀 와 있었고, 대마초를 피우다가 잡힌 술집 아가씨, 시위대에게 음식을 주었다고 잡혀 온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리고 조아라 회장님(YWCA), 이애신 총무님(YWCA), 정현애씨(교사, 송백회 회원) 등도 들어왔다.” (괄호 필자 추가)
이외에도 27일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과 이경희, 전옥주와 항쟁 내내 차량방송을 했던 차명숙, 교사이자 송백회 회원이었던 정현애, 여중생, 궐기대회 사회를 봤던 김태종의 어머니, 도청상황실에서 학생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전남대 음대 4학년 김선옥, 27일 도청을 지키던 중 체포된 여성들을 비롯한 100여 명이 구류되었다.
광산유치장에서 진과 인자(예명) 등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다는 정현애 증언이다.
“진은 집이 서울인데 집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희생당한 시신들이 도청으로 집결하고 이를 상무관으로 옮겨놓았는데, 진이 이 시신들을 돌봐주고 지키는 일을 했다고 해요. 인자는 서포트 역할을 했고요.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물자를 공급하거나 수혈을 하면서 시민군들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무관에 있다가 26일에 아방궁으로 다들 돌아갔는데,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잡혀 왔다고 해요.”
붙잡혀온 여성들은 좁은 방에 약 20명씩 수용되었으며, 불합리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다시 전옥주의 증언이다.
“30명의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생리대가 필요했는데도 그들은 생리대를 한꺼번에 주지 않았다. 우리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생리대 하나 주세요’라고 해야만 했다.”
현재 광산유치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2005년 9월 광주광산경찰서 청사를 새로 지으며 운수동으로 이전했고, 2007년 9월 그 자리에 광신프로그레스 아파트가 들어섰다. 광산유치장은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 아니라 표지석도 세워져 있지 않다. 2015년 ‘5·18민주화운동기념사업 마스터플랜’ 진행 중, 사적지 추가지정과 관련해 광산유치장이 거론됐었다. 그러나 이후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6. 광주 밖 지역들
전남 각지에서도 5·18을 함께 경험했다. 5월 18일 이후 광주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소식은 이내 광주 너머 전남의 다른 시, 군에 전해졌다. 나주, 화순, 강진, 목포, 해남 등지에는 가족이나 지인이 광주에 있는 사람들, 광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살았다. 이들은 광주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직접 찾아가기도, 각자의 지역에서 항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리기 위해 광주 밖으로 나갔다. 21일 오전 시위대는 아시아자동차 공장과 고속버스 회사에 있는 차를 대거 확보해서 전남 각 지역으로 나갔지다. 그러나 항쟁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당국이 전주―서울 방향인 북-동쪽 길을 모두 차단한 뒤였다. 이들은 그대로 전남 도내 서남부, 나주―함평―무안―목포, 나주―영암―강진―장흥―해남―완도와 화순―송광―보성―벌교―고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가 시작되었다. 이를 전해 들은 전남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시위대 차에 올라 광주에 들어가거나, 함께 무기고를 털어 광주로 향했다. 21일 오후 5시 무렵까지는 시위차량들이 광주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광주로 향하는 도로는 예고 없이 차단되었다. 이후 길 근처를 지나가는 차량들에 무차별적으로 사격이 퍼부어졌다. 각 지역에서 총과 사람들을 태우고 광주에 들어가려던 차량들은 총격을 받거나 전복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가 아닌 차량에도 사격을 가했다. 23일 주남마을에서는 화순을 향하던 미니버스 한 대가 총격을 받아 타고 있던 18명 중 한 명만 살아남았다.
광주와 인접한 나주, 화순에서는 주로 광주를 직접 돕기 위해 노력했고, 광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자 지역 안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항쟁을 이어갔다. 21일, 22일 함평, 무안, 영암에서는 차량 수십대가 모여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위했다. 강진은 강진읍 교회에 본부를 두고 청년,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시위에 나섰으며, 강진농고에선 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 쓰고 시위에 참여했다. 해남은 군민 3,000여명이 군민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시민군들에게 숙식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목포의 경우 목포역을 거점으로 27일 항쟁 마지막 날까지 매일 횃불시위, 궐기대회가 일어났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전라남도 곳곳 항쟁이 일어난 자리, 시민들이 희생한 자리에는 5.18 표지석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속적인 요구에 따라 2020년 5월, 전라남도는 목포역, 나주 금성관 앞, 화순 너릿재, 해남 우슬재 등을 비롯한 8개 시․군 25개소를 5·18사적지로 지정했다. 도는 이를 계기로 사적지 관리 계획을 수립해 하반기부터 단계별로 정비 사업을 추진하며, 남도오월길 코스 개발과 해설사 양성에 나서기로 했다.
1
기억은 언제나 어떤 장소에 기반한다.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추상적인 시간의 선이 아니라 공간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장소를 지나며 그곳에 기억을 남기고, 그 장소에는 그곳을 스쳐 간 사람들의 기억이 지층처럼 쌓인다. 공간의 역사를 더듬고 있자면, 같은 시간을 지났지만 어느 곳도 같지 않으며 한 자리에도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중첩되고 교차된다. 기억도 장소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흐르며 어떤 기억은 망각되거나 다시 쓰이고, 장소들은 노화되고 철거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광주도 80년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나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장소들이 바뀌거나 사라졌다.
2
5·18은 쉽게 잊히지 않는 집단 기억이다. 많은 사람이 80년 광주를 함께 겪었으며, 5·18은 많은 이들의 삶의 궤적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집단 기억은 우리의 사사롭고 개인적인 기억과 다르다. 한 사건을 두고 얼기설기 엮여 있는 집단 기억은 역사가 된다. 기억이 역사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기억을 공식적이고 단수화된 기억으로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사건에는 이름이 붙고, 그 원인이나 의미의 해석이 요청된다. 한 사건을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한 이들의 증언은 공적인 기록이 되고,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기억의 기억, 타자들의 기억의 연대가 요청된다.
3
김상봉은 이 지점에서 기억과 기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사건의 기억은 당사자의 일이지만 사건의 기념은 당사자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란 점에서 구별된다. 5·18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은 어떤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지각한 사람의 것이며, 아무리 강렬한 집단적 경험의 경우에도 기억이 그 자체로 세대를 넘어 남을 수는 없다. 세대가 지나면 그 세대의 기억도 사라진다.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의 경험과 기억에 참여하며 “다만 기념하는 것이다.” 이는 “같이-기억하는 것(com-memorare)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이 기억하는 것은 의무나 책임이라기보다 정치적 선택이다. 이는 자기 동일적인 경험 안에 머물지 않기로 선택하고 공동체나 타인의 경험에 참여하며 “자신을 눈앞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과 연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4
어떤 사건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같이 기억하고, 반성하고, 회상하기 위해서 기념 공간이 필요하다. 구체적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건의 희생자와 당사자에게는 위로를 건네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기억이나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기념 공간을 통해 어떤 기억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가 남는다. 이 문제에 대해 벤야민의 역사인식론은 유의미한 시각을 제시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러하다. 즉 지금까지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을 고정점으로 보고 현재는 더듬거리면서 이러한 고정점 쪽으로 인식을 끌어오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관계가 역전됨으로써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깨어나기가 대립된 꿈의 이미지들을 가고 수행하는 종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정치가 역사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들’은 방금 우리에게 부닥쳐오는 것이 된다. 그 사실들을 확인하는 것이 기억이 하는 일이다.”
벤야민은 자신의 역사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하며, 역사인식의 중심이 옛날에 일어난 일, 그것의 기록(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 기억하기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억이 언제나 똑같지 않고 항상 현재에 와서 새롭게 해석되며 다른 의미로 구성되는 것처럼 역사도 과거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현재의 해석과 구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역사적 관심뿐 아니라 정치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정치가 역사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즉 기억에서 기억된 사실이 아니라 기억하는 주체와 기억의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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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통해 옛 도청을 둘러싼 논의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유족들을 비롯한 오월단체에서는 기억이 담긴 장소를 최대한 보존하고자 오래 농성했다. 남아 있는 도청건물의 지난 흔적이 사라지고 건물이 깨끗해지는 것은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곳의 역사까지 지워내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공간이 사라지면서 기억도 함께 사라지는 일은 허다하고,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념공간의 구성을 두고 이들이 제시한 원형복원이라는 방법에는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기억의 장소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지 건물의 형태를 당시 상태로 만들어 보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미 과거 그대로의 재현은 불가능한 상황에 “당시 항쟁(혹은 원형)에 가장 가깝게 재현하는 문제도 결국은 픽션(fiction)이며, 서사적 장치나 전시라는 매개 없이 항쟁 흔적의 보존과 자료의 배열만으로 기념관은 작동하지 않는다.” 기념공간을 통해 당사자가 아닌 타자에게도 기억의 기억, 기념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단지 한 시점에 고정점을 둔 재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서로 다른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이 기념 공간 속에서 그 기억들과 자유롭게 만나서 현재 시점에서 스스로 재해석해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이라면 80년을 직접 겪고 목격한 사람들,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과 그 이후에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가지고 있는 조각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 이어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편집자 주
지금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지난 시간에 그런 일이 도시 전체에, 아니 도시를 넘어서까지 있었다. 우리는 깔끔하게 지나서 지금을 살기에도 바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고 우리는 그 기억의 어떤 조각들을 자주 만난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전 세대가 몸으로 겪은 이야기들은 어떤 점에서는 우리 몸에도 남아있을 것이고, 실은 그전에 우리가 매일 보는 정치뉴스들이 이미 그날들의 기억을 가득 먹고 있다.
글을 대체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우린 한 달 가까이 글에 손을 못 대고 도망 다녔다. 그러다 얼마 전 전옥주씨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뉴스와 함께 당시 성폭행 사건이 5건 더 신고 되었다는 뉴스와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증언하는 몇 개의 뉴스들. 우리는 어떤 기억의 끈을 잡아서 이렇게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있게 되는 걸까.
평화로운 날들에 어딘가 다른 나라에서는, 군부독재와 쿠데타, 무력진압 같은 말들이 다시 들려온다. 여행에서 만난 홍콩친구는 내가 광주에 산다는 말을 하자 나 그 역사를 알고 있어, 라고 했다. 그 친구는 자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어딘가에선 재현되고 있고 기억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어떤 공동체가 공동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그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 살고 있다고, 내 지반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기억할지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확신이 안 들어서 한 번 더 힘주어 말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