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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의 문을 열어 아무것도 아무도 남은 것 없는 빈집임을 확인하지 않기. 창문 틈으로 엿보는 비굴함이 새어 흘러도 들키지 않기. 준비 중인 저녁 밥 냄새가 현관 앞에서 코를 찔러도 착각하지 않기. 울음이 나와도 당신의 마음을 상상하지 않기. 당신에게 두고 온 것들과 당신이 맡겨두곤 찾아가지 못한 것들에 대해 골몰하지 않기.
(졸음을 몰아내는) 저녁 산책 대신 (눈을 뜨다 만) 아침 운동으로, 바퀴 달린 캐리어 대신 단란한 배낭으로, 캠코더와 카메라 대신 신파 로맨스의 드라마로, 해산물의 짠맛 대신 숭늉의 구수맹맹함으로, 꽃과 열매 대신 고목의 줄기와 뿌리로, 풀들의 습기 대신 바람의 건조함으로, 밤의 해변가에서 부는 바닷바람 대신 산 정상에서 부는 땀을 말리는 시린 바람으로, 밝은 달빛에 드러나는 구름 대신 구름 한 점 없는 모노 하늘색으로.
우연한 재회를 상상하지 말기. 처음으로 돌이가고자 바라지 않기. 당신을 잃어버린 내 사랑. 문을 잠그고 빈집에 가두어 부패를 기다리기.
그 애만 생각하면 나는,
빈집이 된다
속절도 영락도 없이.
빈집이 되고 만다.
언제 써 놨던 건지 기억도 안 난다.
휴학으로 보내덨 해의 여름 아니 봄 초여름 와 늦봄이었던 것 같네. 박소연네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전화로 혜원이에게서 또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 처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창피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서 현대사회와 대도시가 잠시 좋아졌던 날. 그날 보았던,
잘린 나무 밑둥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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